[리뷰][책리뷰]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

2024-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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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의 사진을 찾아보면 굉장히 마른 체형에 둥근 안경을 쓴 노년 남성의 모습을 주로 볼 수 있습니다. 나이보다 반짝이는 두 눈과 선이 강한 코, 가로로 긴 선을 그리며 다문 입은 그가 쉽지 않은 성격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하게 합니다. 그런데 최근에 그의 이야기를 들을 일이 많이 생긴단 말이죠. 청소년 시절에 <데미안>이나 <수레바퀴 아래서>는 한 번 쯤 만나보셨겠지요. 저도 두 책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성장하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는 늘 마음이 갑니다. 2021년에 piknic에서 <정원 만들기 GARDENING> 전시를 열었었죠. 그 때 그가 정원 가꾸기에 진심이었고 정원 가꾸기에 대한 글 까지 썼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클래식에 관한 책을 찾던 중 그가 클래식 음악에 대해서도 애호가 수준을 넘어서는 지식과 감상의 깊이를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헤세는 여러모로 아름다움을 사랑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책은 헤르만 헤세의 글 중 음악을 대상으로 하는 가장 중요한 텍스트들을 모아 놓은 것입니다. 굳이 시대적으로 연결할 필요가 없는 구성인데 첫 글이 ‘고음악’인 것은 담백하고 소박한 음악, 종교적 경외심이 담긴 음악에 대한 그의 애정을 반영한 결정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책 곳곳에 있는 고백을 통해 그가 가장 사랑한 작곡가는 바흐와 모차르트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낭만시대 이후의 지나치게 거대해진 악기 편성이나 감정이 과한 음악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좋아하지 않은 수준을 넘어서 신랄하게 비판하곤 했습니다.


<어느 여자 성악가에게 쓴 부치치 않은 편지>라는 글을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저 스스로가 합창을 주로 하는 아마추어 성악가이기 때문입니다. 헤세는 이 글에서 ‘악보에 쓰인 것을 가급적 정확하고 완벽하게 재현한 음악을 듣고 싶’다고 이야기 합니다. 작품의 영혼은 작품 자체에 담겨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며 ‘담담히 침착하고 절제된 모습으로 우아하게’ 노래하던 성악가를 칭송합니다. 연주자가 ‘의지와 지성은 있지만 개인의 모습을 휘발시킨 중재자’이기 바라는 그의 말에서 종교적인 순수한 헌신과 복종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목회자인 부모님을 둔 그는 기본적으로 종교심이 깊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이 글의 마지막에서 그는 ‘아름다움은 환영도 인간의 눈속임도 아닌 신적인 것의 형상화’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에게 있어 아름다움은 신에게 속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적인 감정에 휩쓸리고 군중이 하나의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이는 그가 살았던 히틀러 시대에 대한 반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헤세가 바흐의 <마태 수난곡>을 수십 번 들을 정도로 좋아한다는 점도 저에게 기쁜 일이었습니다. 저도 선물로 받은, 존 엘레엇 가디너 버전의 <마태 수난곡>을 처음 들었을 때 그 상승하는 음악은 아마도 평생 기억될 음악적 경험이었기 때문입니다. <[황야의 이리]에서> 헤르만 헤세는 모차르트를 만나는 장면을 그려내는데 꽤나 흥미롭습니다. 그 속에서 묘사된 모차르트는 지혜로우면서도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묘사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경박한 모습을 보이는데, 후에 헤세가 쓴 엽서에 ‘저는 모차르트의 경쾌함과 무구함이 ... 사무치도록 깨달은 자의 경쾌함과 무구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가 모차르트에 대해 얼마나 깊은 애정과 존경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플루트 연주>라는 제목의 시에서 헤세는 어느 집에서 플루트 연주가 들려올 때 ‘모든 시간은 현재가 되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음악의 본질입니다. ‘음악의 본질이란 시간, 즉 순수한 현재’라는 것입니다. 시간의 예술인 음악을 이렇게 단호하고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다니 깊은 공감을 하였습니다. 아마추어 음악가라도 음악을 하는 시간에는 순수하게 살아있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음악을 시작하는 첫 호흡부터 마지막 끝날 때까지 모든 순간이 음악입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음악은 미적으로 지각 가능하게 된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악이 우리 인생에 굉장히 중요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이 책에서 드러나는 헤세의 음악에 대한 지식과 감상의 깊이가 매우 넓고 깊어서 잘 이해되지 않는 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진으로 보기에 냉정해보이는 그가 음악을 통해 경험하는 우주의 질서와 조화에 대해 얼마나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 모든 것들이 작은 씨앗 안에 품은 자연의 이치를 탐구하는 그의 정원에 대한 열정과도 연결된 것이리라 생각이 듭니다. 소리나 이미지 등 감각적인 것이 넘쳐납니다. 그러한 자극을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진정 아름다운 것을 가려내어 감상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시대입니다. 좋은 것을 가려내는 것은 좋고 싫음의 문제가 아니라 지성과 의지에 달려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과거로부터 내려온 유산과 현재의 것을 적극적으로 경험하고 살펴보면서 세상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