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배도, 우리의 헤테로토피아
가배도의 새 슬로건입니다.
헤테로토피아는 미셸 푸코가 제시한 개념으로서
지리적으로 실재하는, 현실화된 유토피아를 말합니다.
한국에서 출판된 책으로는
16페이지(11p - 26p)에 불과한,
1966년에 이루어진 푸코의
라디오 강연을 정리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후 많은 사람에게 사유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가배도가 지금 '헤테로토피아'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같이 읽어보면서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12p.
한데 나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장소,
우리가 지도 위에 위치지을 수 있는
장소를 가지는 유토피아들,
그리고 명확한 시간,
우리가 매일매일의 달력에 따라 고정시키고
측정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는 유토피아들이
- 모든 사회에 -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인간 집단이든 그것이 점유하고
실제로 살고 일하는 공간 안에서
유토피아적인 장소들을 구획하고,
그것이 바삐 움직이는 시간 속에서
유크로니아적인 순간들을 구획한다.
푸코가 이야기하는 헤테로토피아가
모든 사회에나 있다고 이야기하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13p.
그런데 서로 구별되는 이 온갖 장소들 가운데
절대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
자기 이외의 모든 장소들에 맞서서,
어떤 의미로는 그것들을 지우고 중화시키고
혹은 정화시키기 위해 마련된 장소들.
그것은 일종의 반反공간이다.
여기서 반反은 '되돌릴 반'으로
'무엇무엇에 반하다'의 '반'입니다.
어떤 장소를 '반공간'이라고 말하는지
이어서 읽어봅니다.
13p.
아이들은 그것을 완벽하게 알고 있다.
그것은 당연히 정원의 깊숙한 곳이다.
그것은 당연히 다락방이고,
더 그럴듯하게는 다락방 한가운데 세워진
인디언 텐트이며, 아니면 -
목요일 오후 - 부모의 커다란 침대이다.
바로 이 커다란 침대에서 아이들은 대양을 발견한다.
거기서는 침대보 사이로 헤엄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커다란 침대는 하늘이기도 하다.
스프링 위에서 뛰어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숲이다.
거기 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밤이다.
거기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유령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침내 쾌락이다.
부모가 돌아오면 혼날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서에 익숙치 않은 저로서는
이 부분은 차라리 시처럼 느껴집니다.
철학자랑 시인은 한 끝 차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까지 읽으니 헤테로토피아는 뭔가 순수하고
낭만적인 장소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계속 읽어보겠습니다.
14p.
어른의 사회는 아이들보다 훨씬 먼저
자기만의 반공간, 자리매겨진 유토피아,
모든 장소 바깥의 실제 장소들을 스스로 조직했다.
예를 들면, 정원이 있고
묘지가 있고
감호소가 있고
사창가가 있고
감옥이 있고
클럽 메드의 휴양촌이 있고,
그 밖에도 많다.
정원이나 휴양촌은 이해하겠는데
묘지나 감호소, 사창가와 감옥은 대체 무슨 소리일까요.
14p.
그러니, 나는 우리가 사는 공간에
신화적이고 실제적인 이의제기를 수행하는
이 다른 공간들,
다른 장소들을 대상으로 삼게 될 하나의 과학 -
나는 분명히 과학이라고 말한다 - 을 꿈꾼다.
푸코가 이야기하는 헤테로토피아는
우리의 익숙한 공간들에
'신화적이고 실제적인 이의제기를 수행'한다고
말합니다.
15p.
첫번째 원리. 자체적인 헤테로토피아...
...그런데 이 특권화된 또는 신성시된 장소들을
일반적으로 '생물학적 위기를 겪고 있는'
개인들을 위한 것이다.
사춘기의 청소년들을 위한 특별한 집.
달거리에 들어간 여성들이 쓸 수 있는 특별한 집.
출산을 기대리는 여성들을 위한 오두막.
생물학적 과도기에 있는 개인들을 위한
이러한 헤테로토피아는
우리 사회에서는 거의 사라져버렸다...
...한데 이 생물학적 헤테로토피아,
위기의 헤테로토피아는 점점 사라지고
일탈의 헤테로토피아가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그러니까 사회가 자신의 가장자리에,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빈 광야에,
평균 혹은 규범의 요구로부터
일탈된 행동을 하는 개인들에게
마련해놓은 장소들 말이다.
요양소, 정신병원, 그리고 물론
감옥이 거기에 속한다.
아마 이에 양로원을 더해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처럼 바쁜 사회에서는
무위도 결국 일종의 일탈이기에 그렇다.
17p.
헤테로폴로지 과학의 두번째 원리.
역사가 흐르면서 모든 사회는
그것이 이전에 구축했던 헤테로토피아를
완전히 흡수하거나 사라지게 할 수도 있고,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헤테로토피아를 조직할 수도 있다...
...묘지는 우리의 현재적 경험에서
헤테로토피아의 가장 자명한 사례이다.
(묘지는 절대적으로 다른 장소이다.)...
...나는 망통의 멋진 묘지를 떠올린다.
19세기 말, 코트다쥐르에 휴양 왔다가
죽음을 맞이한 지체 높은 결핵 환자들이
거기에 잠들어 있다.
또 다른 헤테로토피아.
뭔가 기대했던 이야기가 아니어서 헷갈리네요.
하지만 전반적으로
뭔가 일상적인 상태가 아닌 경우에
다다르는 장소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18p.
일반적으로 헤테로토피아는 보통
서로 양립 불가능한,
양립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여러 공간을
실제의 한 장소에 겹쳐놓는 데 그 원리가 있다.
헤테로토피아의 하나인 극장은
사각형의 무대 위에
온갖 낯선 장소들이 연이어지게 만든다.
사람들은 영화관의 거대한 장방형의 무대 그 깊숙이
이차원의 공간 위에 삼차원의 공간을 새로이 영사한다.
하지만 아마도 헤테로토피아의 가장 오래된 예는
정원일 것이다.
천 년도 더 된 이 발명품은
동양에서는 확실히 마법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만일 동양의 양탄자가 원래 정원 -
엄밀하게는 '겨울 정원' - 의 복제물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날아다니는 양탄자,
세상을 종횡무진 누비는 양탄자의 전설상의 가치를
이해할 수 있다.
정원은 세상 전체가
상징적 완벽성을 얻게 되는 양탄자이며,
양탄자는 공간을 가로질러 움직이는 정원이다.
20p.
헤테로토피아는 십중팔구
시간의 독특한 분할과 연결된다.
말하자면 그것은 헤테로크로니아와 한 계열이다.
물론 묘지는 더 이상 시간이 흐르지 않는 장소이다.
일반적으로 우리 사회같은 곳에는
무한히 쌓여가는 시간의 헤테로토피아들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박물관이나 도서관 같은 곳...
...모든 것을 축적한다는 발상,
어떤 의미로는 시간을 정지시킨다는 발상,
혹은 시간을 어떤 특권화된 공간에
무한히 누적시킨다는 발상,
모든 시간, 모든 시대, 모든 형태와 모든 취향을
하나의 장소 안에 가두어놓으려는 의지,
마치 이 공간 자체는
확실히 시간 바깥에 있을 수 있다는 듯
모든 시간의 공간을 구축하려는 발상,
이는 완전히 근대적인 것이다.
지금과 같은 형식의 공공의 박물관과 도서관은
우리 문화에 고유한 헤테로토피아들이다.
아하.
헤테로토피아는 비단 장소만이 아니라
시간이 멈추거나 누적되는 등
독특한 시간성이라는 특징을 갖는 것 같습니다.
20p.
그에 반해, 영원성의 양식이 아니라
축제의 양식으로 시간과 연계된
헤테로토피아들이 있다.
영원성의 헤테로토피아가 아닌,
한시적인 헤테로토피아.
당연히 극장이 그렇고,
시장 또한 그러하며,
마을의 변두리나
어떤 경우엔 심지어
마을 한가운데 있는 멋진 공터가 그러하다.
거기에 가건물, 좌판, 온갖 희한한 물건들,
격투사, 뱀여인, 그리고 점쟁이들이
일 년에 한두 번씩 들어찬다.
더 최근의 우리 문명사에는 휴양촌이 있다.
나는 특히 폴리네시아의 경이로운 말을을 생각한다.
지중해 가장자리에 있는 그 마을은
우리 도시인들에게 삼 주라는 짧은 기간 동안
원초적이고도 영원한 벌거숭이로 지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예컨대, 제르바 섬의 휴양촌 오두막은
어떤 의미에서는 도서관이나 박물관과 같은 계열이다.
영원성의 헤테로토피아 - 사람들은
인류의 가장 오랜 전통과
다시 관계를 맺도록 초대된다 -
라는 점에서 말이다.
동시에 그것은 모든 도서관,
모든 박물관에 대한 부정이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시간을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을 지우고 벌거숭이로
원죄의 순수함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22p.
이제 또 다른 헤테로토피아는 축제가 아니라
통과, 변형, 갱생의 노고와 관련된다...
...오늘날에는 특히 감옥이 그렇다.
마지막으로 나는 다음의 사실을 헤테로토폴로지의
다섯번째 원리로 제안하고자 한다.
헤테로토피아는 언제나 그것을
주변 환경으로부터 고립시키는
열림과 닫힘의 체계를 갖는다.
우리는 거기에 강제로 들어가거나 (감옥의 경우),
특정한 의례나 정결의식에 따라 들어간다...
...반면 외부 세계에 닫혀 있지 않고
전면적으로 열려 있는
또 다른 헤테로토피아도 있다.
누구라도 거기 들어갈 수 있지만
사실 일단 들어가고 나면 그것은 환상일 뿐,
어디에도 들어간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직감하게 된다.
그 헤테로토피아는 열린 장소이지만
당신을 계속해서 바깥에 놔두는 속성을 가진다...
...달리 말해, 누구나 낮이든 밤이든
아무 시간에다 이 방에 들어와 휴식을 취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누구의 눈에 뜨이거나 알려지지 않은 채
다음 날 아침 떠날 수 있었다...
...열려있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일찌감치 입문한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헤테로토피아도 있다.
우리는 정말 단순하고 확실히
주어져 있는 것에 다가간다고 믿지만,
실상 미스터리의 중심에 있는 셈이다.
적어도 예전에 아라공은 바로 그런 방식으로
매음굴에 들어갔던 것이다...
...우리는 아마도 여기서
헤테로토피아들에게 가장 본질적인 것을
다시 만난다.
헤테로토피아들은
다른 모든 공간에 대한 이의제기이다.
그것들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의제기를 수행할 수 있다.
아라공이 말했던 매음굴처럼
나머지 현실이 환상이라고 고발하는
환상을 만들어냄으로써,
아니면 그 반대로
우리 사회가 무질서하고 정리되어 있지 않고
뒤죽박죽이라고 보일 만큼
완벽하고 주도면밀하고 정돈된
또 다른 현실 공간을 실제로 만들어냄으로써.
26p.
만일 자급자족적이고 자기폐쇄적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자유롭지만
바다의 무한성에 숙명적으로 내맡겨져 있는,
장소 없는 장소이자 떠다니는 공간의 조각인 배,
19세기의 거대한 배가
이 항구에서 저 항구로,
이 홍등가에서 저 홍등가로,
이 항로에서 저 항로로 전전하면서
우리가 조금 전에 이야기했던
동방의 정원 안에 아주 소중하게 간직되어 있는 것을
찾으러 식민지까지 갔다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는 배가 왜 우리 문명에서 -
적어도 16세기 이래로는 -
가장 거대한 경제적 수단인 동시에
가장 거대한 상상력의 보고였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배, 그것은 특출한 헤테로토피아이다.
배 없는 문명이란
자녀들이 뛰놀 만한 커다란 침대를 갖고 있지 않은
부모를 둔 아이들과도 같다.
그리하여 그들의 꿈은 고갈되고,
정탐질이 모험을 대신하며,
경찰의 추악함이 해적의 눈부시게 빛나는
아름다움을 대체하고 마는 것이다.
끝까지 읽어도
헤테로토피아가 어떤 장소인지
이해하기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결국 헤테로토피아는
다양한 속성을 가진 다양한 장소들을 일컫는데
일상에서 벗어난 시간성을 가지고
구분되어 있으며
기존의 장소들에 이의제기를 하며
상상력을 북돋아주는 장소의
이미지를 가졌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가배도가 제공해드리고 싶은 장소도 그러합니다.
복잡한 일상에서 조금 벗어난 장소이기 바라고
이곳에서 낯선 것을 발견하고
정서나 관심의 환기가 일어나기 바랍니다.
그래서 조금 더 넓은 세상과 연결되는 장소,
나를 더 깊이 이해하고
상상력을 가지고 세계를 바라보는
장소가 되기 바랍니다.
가배도, 우리의 헤테로토피아에서
쉼을 얻고 새로운 시각을 얻어가시기 바랍니다.
가배도, 우리의 헤테로토피아
가배도의 새 슬로건입니다.
헤테로토피아는 미셸 푸코가 제시한 개념으로서
지리적으로 실재하는, 현실화된 유토피아를 말합니다.
한국에서 출판된 책으로는
16페이지(11p - 26p)에 불과한,
1966년에 이루어진 푸코의
라디오 강연을 정리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후 많은 사람에게 사유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가배도가 지금 '헤테로토피아'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같이 읽어보면서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12p.
한데 나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장소,
우리가 지도 위에 위치지을 수 있는
장소를 가지는 유토피아들,
그리고 명확한 시간,
우리가 매일매일의 달력에 따라 고정시키고
측정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는 유토피아들이
- 모든 사회에 -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인간 집단이든 그것이 점유하고
실제로 살고 일하는 공간 안에서
유토피아적인 장소들을 구획하고,
그것이 바삐 움직이는 시간 속에서
유크로니아적인 순간들을 구획한다.
푸코가 이야기하는 헤테로토피아가
모든 사회에나 있다고 이야기하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13p.
그런데 서로 구별되는 이 온갖 장소들 가운데
절대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
자기 이외의 모든 장소들에 맞서서,
어떤 의미로는 그것들을 지우고 중화시키고
혹은 정화시키기 위해 마련된 장소들.
그것은 일종의 반反공간이다.
여기서 반反은 '되돌릴 반'으로
'무엇무엇에 반하다'의 '반'입니다.
어떤 장소를 '반공간'이라고 말하는지
이어서 읽어봅니다.
13p.
아이들은 그것을 완벽하게 알고 있다.
그것은 당연히 정원의 깊숙한 곳이다.
그것은 당연히 다락방이고,
더 그럴듯하게는 다락방 한가운데 세워진
인디언 텐트이며, 아니면 -
목요일 오후 - 부모의 커다란 침대이다.
바로 이 커다란 침대에서 아이들은 대양을 발견한다.
거기서는 침대보 사이로 헤엄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커다란 침대는 하늘이기도 하다.
스프링 위에서 뛰어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숲이다.
거기 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밤이다.
거기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유령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침내 쾌락이다.
부모가 돌아오면 혼날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서에 익숙치 않은 저로서는
이 부분은 차라리 시처럼 느껴집니다.
철학자랑 시인은 한 끝 차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까지 읽으니 헤테로토피아는 뭔가 순수하고
낭만적인 장소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계속 읽어보겠습니다.
14p.
어른의 사회는 아이들보다 훨씬 먼저
자기만의 반공간, 자리매겨진 유토피아,
모든 장소 바깥의 실제 장소들을 스스로 조직했다.
예를 들면, 정원이 있고
묘지가 있고
감호소가 있고
사창가가 있고
감옥이 있고
클럽 메드의 휴양촌이 있고,
그 밖에도 많다.
정원이나 휴양촌은 이해하겠는데
묘지나 감호소, 사창가와 감옥은 대체 무슨 소리일까요.
14p.
그러니, 나는 우리가 사는 공간에
신화적이고 실제적인 이의제기를 수행하는
이 다른 공간들,
다른 장소들을 대상으로 삼게 될 하나의 과학 -
나는 분명히 과학이라고 말한다 - 을 꿈꾼다.
푸코가 이야기하는 헤테로토피아는
우리의 익숙한 공간들에
'신화적이고 실제적인 이의제기를 수행'한다고
말합니다.
15p.
첫번째 원리. 자체적인 헤테로토피아...
...그런데 이 특권화된 또는 신성시된 장소들을
일반적으로 '생물학적 위기를 겪고 있는'
개인들을 위한 것이다.
사춘기의 청소년들을 위한 특별한 집.
달거리에 들어간 여성들이 쓸 수 있는 특별한 집.
출산을 기대리는 여성들을 위한 오두막.
생물학적 과도기에 있는 개인들을 위한
이러한 헤테로토피아는
우리 사회에서는 거의 사라져버렸다...
...한데 이 생물학적 헤테로토피아,
위기의 헤테로토피아는 점점 사라지고
일탈의 헤테로토피아가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그러니까 사회가 자신의 가장자리에,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빈 광야에,
평균 혹은 규범의 요구로부터
일탈된 행동을 하는 개인들에게
마련해놓은 장소들 말이다.
요양소, 정신병원, 그리고 물론
감옥이 거기에 속한다.
아마 이에 양로원을 더해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처럼 바쁜 사회에서는
무위도 결국 일종의 일탈이기에 그렇다.
17p.
헤테로폴로지 과학의 두번째 원리.
역사가 흐르면서 모든 사회는
그것이 이전에 구축했던 헤테로토피아를
완전히 흡수하거나 사라지게 할 수도 있고,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헤테로토피아를 조직할 수도 있다...
...묘지는 우리의 현재적 경험에서
헤테로토피아의 가장 자명한 사례이다.
(묘지는 절대적으로 다른 장소이다.)...
...나는 망통의 멋진 묘지를 떠올린다.
19세기 말, 코트다쥐르에 휴양 왔다가
죽음을 맞이한 지체 높은 결핵 환자들이
거기에 잠들어 있다.
또 다른 헤테로토피아.
뭔가 기대했던 이야기가 아니어서 헷갈리네요.
하지만 전반적으로
뭔가 일상적인 상태가 아닌 경우에
다다르는 장소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18p.
일반적으로 헤테로토피아는 보통
서로 양립 불가능한,
양립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여러 공간을
실제의 한 장소에 겹쳐놓는 데 그 원리가 있다.
헤테로토피아의 하나인 극장은
사각형의 무대 위에
온갖 낯선 장소들이 연이어지게 만든다.
사람들은 영화관의 거대한 장방형의 무대 그 깊숙이
이차원의 공간 위에 삼차원의 공간을 새로이 영사한다.
하지만 아마도 헤테로토피아의 가장 오래된 예는
정원일 것이다.
천 년도 더 된 이 발명품은
동양에서는 확실히 마법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만일 동양의 양탄자가 원래 정원 -
엄밀하게는 '겨울 정원' - 의 복제물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날아다니는 양탄자,
세상을 종횡무진 누비는 양탄자의 전설상의 가치를
이해할 수 있다.
정원은 세상 전체가
상징적 완벽성을 얻게 되는 양탄자이며,
양탄자는 공간을 가로질러 움직이는 정원이다.
20p.
헤테로토피아는 십중팔구
시간의 독특한 분할과 연결된다.
말하자면 그것은 헤테로크로니아와 한 계열이다.
물론 묘지는 더 이상 시간이 흐르지 않는 장소이다.
일반적으로 우리 사회같은 곳에는
무한히 쌓여가는 시간의 헤테로토피아들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박물관이나 도서관 같은 곳...
...모든 것을 축적한다는 발상,
어떤 의미로는 시간을 정지시킨다는 발상,
혹은 시간을 어떤 특권화된 공간에
무한히 누적시킨다는 발상,
모든 시간, 모든 시대, 모든 형태와 모든 취향을
하나의 장소 안에 가두어놓으려는 의지,
마치 이 공간 자체는
확실히 시간 바깥에 있을 수 있다는 듯
모든 시간의 공간을 구축하려는 발상,
이는 완전히 근대적인 것이다.
지금과 같은 형식의 공공의 박물관과 도서관은
우리 문화에 고유한 헤테로토피아들이다.
아하.
헤테로토피아는 비단 장소만이 아니라
시간이 멈추거나 누적되는 등
독특한 시간성이라는 특징을 갖는 것 같습니다.
20p.
그에 반해, 영원성의 양식이 아니라
축제의 양식으로 시간과 연계된
헤테로토피아들이 있다.
영원성의 헤테로토피아가 아닌,
한시적인 헤테로토피아.
당연히 극장이 그렇고,
시장 또한 그러하며,
마을의 변두리나
어떤 경우엔 심지어
마을 한가운데 있는 멋진 공터가 그러하다.
거기에 가건물, 좌판, 온갖 희한한 물건들,
격투사, 뱀여인, 그리고 점쟁이들이
일 년에 한두 번씩 들어찬다.
더 최근의 우리 문명사에는 휴양촌이 있다.
나는 특히 폴리네시아의 경이로운 말을을 생각한다.
지중해 가장자리에 있는 그 마을은
우리 도시인들에게 삼 주라는 짧은 기간 동안
원초적이고도 영원한 벌거숭이로 지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예컨대, 제르바 섬의 휴양촌 오두막은
어떤 의미에서는 도서관이나 박물관과 같은 계열이다.
영원성의 헤테로토피아 - 사람들은
인류의 가장 오랜 전통과
다시 관계를 맺도록 초대된다 -
라는 점에서 말이다.
동시에 그것은 모든 도서관,
모든 박물관에 대한 부정이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시간을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을 지우고 벌거숭이로
원죄의 순수함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22p.
이제 또 다른 헤테로토피아는 축제가 아니라
통과, 변형, 갱생의 노고와 관련된다...
...오늘날에는 특히 감옥이 그렇다.
마지막으로 나는 다음의 사실을 헤테로토폴로지의
다섯번째 원리로 제안하고자 한다.
헤테로토피아는 언제나 그것을
주변 환경으로부터 고립시키는
열림과 닫힘의 체계를 갖는다.
우리는 거기에 강제로 들어가거나 (감옥의 경우),
특정한 의례나 정결의식에 따라 들어간다...
...반면 외부 세계에 닫혀 있지 않고
전면적으로 열려 있는
또 다른 헤테로토피아도 있다.
누구라도 거기 들어갈 수 있지만
사실 일단 들어가고 나면 그것은 환상일 뿐,
어디에도 들어간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직감하게 된다.
그 헤테로토피아는 열린 장소이지만
당신을 계속해서 바깥에 놔두는 속성을 가진다...
...달리 말해, 누구나 낮이든 밤이든
아무 시간에다 이 방에 들어와 휴식을 취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누구의 눈에 뜨이거나 알려지지 않은 채
다음 날 아침 떠날 수 있었다...
...열려있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일찌감치 입문한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헤테로토피아도 있다.
우리는 정말 단순하고 확실히
주어져 있는 것에 다가간다고 믿지만,
실상 미스터리의 중심에 있는 셈이다.
적어도 예전에 아라공은 바로 그런 방식으로
매음굴에 들어갔던 것이다...
...우리는 아마도 여기서
헤테로토피아들에게 가장 본질적인 것을
다시 만난다.
헤테로토피아들은
다른 모든 공간에 대한 이의제기이다.
그것들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의제기를 수행할 수 있다.
아라공이 말했던 매음굴처럼
나머지 현실이 환상이라고 고발하는
환상을 만들어냄으로써,
아니면 그 반대로
우리 사회가 무질서하고 정리되어 있지 않고
뒤죽박죽이라고 보일 만큼
완벽하고 주도면밀하고 정돈된
또 다른 현실 공간을 실제로 만들어냄으로써.
26p.
만일 자급자족적이고 자기폐쇄적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자유롭지만
바다의 무한성에 숙명적으로 내맡겨져 있는,
장소 없는 장소이자 떠다니는 공간의 조각인 배,
19세기의 거대한 배가
이 항구에서 저 항구로,
이 홍등가에서 저 홍등가로,
이 항로에서 저 항로로 전전하면서
우리가 조금 전에 이야기했던
동방의 정원 안에 아주 소중하게 간직되어 있는 것을
찾으러 식민지까지 갔다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는 배가 왜 우리 문명에서 -
적어도 16세기 이래로는 -
가장 거대한 경제적 수단인 동시에
가장 거대한 상상력의 보고였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배, 그것은 특출한 헤테로토피아이다.
배 없는 문명이란
자녀들이 뛰놀 만한 커다란 침대를 갖고 있지 않은
부모를 둔 아이들과도 같다.
그리하여 그들의 꿈은 고갈되고,
정탐질이 모험을 대신하며,
경찰의 추악함이 해적의 눈부시게 빛나는
아름다움을 대체하고 마는 것이다.
끝까지 읽어도
헤테로토피아가 어떤 장소인지
이해하기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결국 헤테로토피아는
다양한 속성을 가진 다양한 장소들을 일컫는데
일상에서 벗어난 시간성을 가지고
구분되어 있으며
기존의 장소들에 이의제기를 하며
상상력을 북돋아주는 장소의
이미지를 가졌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가배도가 제공해드리고 싶은 장소도 그러합니다.
복잡한 일상에서 조금 벗어난 장소이기 바라고
이곳에서 낯선 것을 발견하고
정서나 관심의 환기가 일어나기 바랍니다.
그래서 조금 더 넓은 세상과 연결되는 장소,
나를 더 깊이 이해하고
상상력을 가지고 세계를 바라보는
장소가 되기 바랍니다.
가배도, 우리의 헤테로토피아에서
쉼을 얻고 새로운 시각을 얻어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