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봄과 아수라> 미야자와 겐지

2024-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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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도 지지 않고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에도 여름날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을 지니며

욕심이 없이

화내는 법도 없이

언제나 조용히 미소 짓는다

하루에 현미 네 홉과

된장과 약간의 채소를 먹으며

세상 모든 일을

제 몫을 셈하지 않고

잘 보고 듣고 헤아려

그리하여 잊지 않고

들판 솔숲 그늘 아래

작은 초가지붕 오두막에 몸을 누이며

동쪽에 아픈 아이가 있으면

가서 보살펴주고

서쪽에 지친 어머니 있으면

가서 그 볏짐을 지고

남쪽에 죽어가는 사람 있으면

가서 무서울 것 없으니 괜찮다 하고

북쪽에 싸움이나 소송 있으면

부질없는 짓이니 그만두라 하고

가뭄 든 때에는 눈물 흘리고

추위 온 여름에는 버둥버둥 걸으며

모두에게 바보라 불리고

칭찬도 받지 않고

고통도 주지 않는

그런 사람이

나는 되고 싶네


이 시는 일본의 동화작가이자 시인이며 교육자이었던

미야자와 겐지 사후에 남겨진 

수첩에서 발견된 시입니다.


아, 이 시를 어디서 보았더라...

생각해보니 일본 드라마 <중쇄를 찍자>에 나온 것이 

생각납니다.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출판회사 <흥도관>의 사장, 

쿠지 마사루가 방황하던 젊은 시절 

빛이 되어준 글이었던 것입니다.



미야자와 겐지는 농업학교 교사이자 농민으로

농민 계몽과 농촌 발전에도 힘썼다고 합니다.

그의 고향인 도호쿠 지방은 2011년 

바로 그 쓰나미의 피해를 입기도 했던 지역으로

예전에도 온갖 자연재해로 척박했고 

농민들은 힘겨운 삶을 살았던 곳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미야자와 겐지의 시각은 우주적이었고

그 감수성은 너무나도 세밀했습니다.

그래서 이 시집을 읽는 것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감수성을 따라갈 수 없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

서성이는 말도 그 모든 것들이

환하고 눈부셔

...

너무 눈이 부셔서

공기조차 살짝 아플 지경입니다

 <우아한 안개> 중에서


간혹 그의 시어가 이해되는 것은

이런 표현들이었습니다.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사람,

그렇지만 따뜻한 사람입니다.


겐지는 인간을 거대한 우주 가운데

잠깐 깜빡이는 점으로 보았고

저 옛날 인간이 있기 전부터의 시간의 흐름 가운데

아주 잠깐의 존재로서 보았습니다.

<비에도 지지 않고>의 인간상은

그런 사고에 기반한 아주 겸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치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시라는 문학 형태에 익숙하지 않고

요즘처럼 빠른 정보에 적응한 뇌가

천천히 읽는 것을 어려워함에도

이 시집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은

<비에도 지지 않고>라는 시가

우리에겐 윤동주의 시가 그렇듯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사람,

본 적도 없지만 그리운 사람같은

마음에 애잔함을 느끼게 했기 때문입니다.


<중쇄를 찍자>에서 이 글에 교화 받은 쿠지는

'운을 모으기 위해' 일상에 선을 쌓아갑니다.

이런 행동은 야구선수 오타니 쇼헤이가

다른 사람이 버린 행운을 줍기 위해

수시로 길에 떨어진 쓰레기를 줍는 행위와 연결됩니다.

너무나도 크고 경이로운 우주에는

심령이 가난한 자를 돕는 어떤 손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진짜 시인, 진짜 예술가란

일반인과는 전혀 다른 수준의 

감수성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느낍니다.

이를테면 눈이 5.0인 사람이 있다면

전혀 다른 것을 볼 수 있겠죠.

더 작은 것을 보고 더 멀리 보고.

그런 느낌이지 않을까요.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끼는 사람.

이 시집을 보면서 든 생각입니다.

그런데 너무 뛰어나서

이 우주 가운데 인간의 작음과 덧없음을

너무나 잘 아는 사람.

그래서인지 <비에도 지지 않고>를 읽으니

어쩐지 부끄러운 기분도 듭니다.

그렇게 겸손히

내 주변의 세상을 조금이나마 낫게 만들고 가는게

인생의 전부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눈 앞에 있는 것에 메여 살아가는

보통사람인 저는

왜인지 한숨을 쉬며

세세히 읽지 못한 책장을 덮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