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책리뷰] 이바라기 노리코 시집

2024-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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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저 (이바라기 노리코)는

(2006)년 (2)월 (17)일 (지주막하출혈)로,

이 세상을 하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생전에 써둔 것입니다.

내 의지로, 장례, 영결식은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앞으로 이 집에는 제가 살지 않으니

조위품이나 꽃 같은 것들을 보내지 말아주세요.

반송 못하는 무례를 더하게 됩니다.

"그 사람이 떠났구나"하고 한순간, 단지 한순간

생각해 주셨으면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오랫동안 당신께서 베풀어 주신 따뜻한 교제는

보이지 않는 보석처럼, 내 가슴속을 채워서 빛을 발하고,

내 인생을 얼마만큼 풍부하게 해 주셨는지...

깊은 감사와 함께 이별의 인사말을 드립니다.

고마웠습니다.

2006년 3월 길일


이 글은 일본의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가 

향년 80세로 세상을 떠나기에 앞서

미리 적어서 인쇄해 두었다가

사망 일자와 사인을 적어서 지인들에게 보내달라고 

조카 부부에게 부탁한 '하직인사'입니다.

세상에 이렇게 깔끔하고 명쾌한 마무리가 있을까요.


사진 속 그녀의 모습도 지성과 당당함이 느껴집니다.


이바라기 노리코는 원폭으로 패망한 

일본에 사는 사람으로서의 삶을

담담하게 담은 시,

<내가 가장 예뻤을 때>로 유명합니다.


...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 나라는 전쟁에 패했다

그런 어이없는 일이 있단 말인가

블라우스 소매를 걷어붙이고 비굴한 거리를 활보하였다

...


이렇듯 그녀는

나라라던지 민족이라던지 하는

어떤 정체성에 매몰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시선으로 삶을 바라봅니다.


그녀는 또한 윤동주의 시를 사랑해서

일본 교과서에 윤동주의 시 3편을 실었고

윤동주가 분명히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는 것을 교과서에 기재한 사람입니다.

그녀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재미있게도 

그녀가 윤동주의 사진을 보고

그 맑고 청아한 얼굴에 호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의 '수선화 같은 향기를 풍기는' 글을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일본 교과서에 실린 그녀의 수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서

전혀 쑥쓰러워하지도 않고 밝히는

윤동주와 윤동주의 글에 대한 깊은 애정에

저는 굉장히 공감하고 말았습니다.


그녀의 시는 이렇듯 아주 당찹니다.

또 다른 굉장한 시가 있습니다.


네 감수성 정도는


...

초심을 잃어가는 것을

세월 탓하지 마라

애초부터 미약한 뜻에 지나지 않았다


안 좋은 것 전부를

시대 탓하지 마라

희미하게 빛나는 존엄의 포기


네 감수성 정도는

스스로 지켜라

바보야


어찌나 신랄한지

제 속이 다 시원할 지경입니다.

그런 그녀도 소녀다운 감성이 있지만

영 부끄러워 말도 못하는 소녀가 아니라

강렬하게 사랑에 빠지는

그런 소녀입니다.


<바보 같은 노래>에서

그녀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

소녀는 유혹되어야 해요

그것도 당신 같은 사람에게


저는 여기서 그녀가

시오노 나나미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시오노 나나미의 역사물을 보면

역사 속 위대한 인물들에 대한

그녀의 애정, 

어쩌면 연애 감정과도 비슷한 

강렬한 마음이 느껴지는데

이바라기 노리코도

그만큼 강하게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멋진 여자란

마음껏 좋아하는 사람이 아닐까


꼭 여자만 해당되는 건 아니지만

너무 조심스러워 하거나

아니면 되려 너무 밝히는

그런 연애감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반해버린 대상에 대해

깊이 애정하고 존경하고

궁금해하고 연구하고

그것을 자신의 방식으로 표현할 줄 아는

그런 삶의 태도 말입니다.


좋아하는 마음의 강력한 힘이

우리를 특별한 사람을 만들어 줍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좋아하시나요.